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네바미 토시로 (문단 편집) === 내력 === [[아시카가 다카우지]]가 서국에 내려갔을 당시 오토모 우지토키가 충성의 표시로 헌상한 이래 [[미카즈키 무네치카]], [[오오텐타 미츠요]], [[오니마루 쿠니츠나]] 등과 함께 아시카가 가의 중대 보검으로 전래되었다. 한때 아시카가 가의 가신에게 주어진 적이 있다고 하나, [[아시카가 요시테루]] 집권기에 아시카가 가로 돌아왔다고 한다.[* 이 시점에서 이미 나기나타에서 [[태도]]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.] 에이로쿠의 변 당시 [[아시카가 요시테루]]의 부하가 쥐고 휘둘렀다는 설이 있으나, 거론된 부하는 당시에는 이미 고인인지라 다른 보검들과 함께 [[아시카가 요시테루]]가 휘둘렀거나, 혹은 보관되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. [[에이로쿠의 변]] 이후 [[마츠나가 히사히데]]의 소유물이 되었다. [[마츠나가 히사히데]]는 이 검을 대단히 아꼈으나,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[[오토모 소린]]이 호네바미의 반환을 요구하였다. [[마츠나가 히사히데]]는 이를 거부하다 결국 3천냥과 각종 보물을 받고 [[오토모 소린]]에게 양도하였다. 이후 1589년 [[도요토미 히데요시]]가 호네바미의 헌상을 요구하였기에 오토모 요시무네는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반 강제로 헌상하게 되는데, 요시무네는 당시 호네바미가 없는 오토모는 망할 것이라며 눈물을 머금고 헌상했다고 한다.[* 오오토모 흥폐기(大友興廢記) 기록]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갈때 혼아미가에서 무네와 나카고를 갈아내고, 오시가타를 찍은 기록이 있다. 이때에 아와타구치 요시미츠의 작품임을 확정하였다. 도요토미 가에서는 이 검을 1번 도검상자의 1번 도검으로 기록한 바 있다. 히데요시 사후 그의 아들 [[도요토미 히데요리]]에게로 소유권이 넘어가게 된다.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. 이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과 기록이 있는데, 진흙 속에서 발견된 호네바미를 농민이 주워다 혼아미가에 전달하고[* 이 때 당시, 농민이 내다팔려고 하였으나 두려워하여 아무도 사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.], 혼아미가에서는 이를 이에야스에게 보였다는 설, 오사카 겨울 전투 이후 키무라 시게나리에게 하사되어 전투당시 차고있던 와키자시를 도쿠가와군이 강탈하여 바쳤다는 설 등 여러가지가 있다.[* 다만, 다른 기록에는 키무라 시게나리가 하사품을 전부 거절하였다고 되어있기도 하므로 시게나리 설은 확신하기가 어렵다.] 당시 이에야스는 무겁고 길어 자신이 차기에 어렵다 하며 이를 히데타다에게 보이라 하였고, 히데타다는 매우 기뻐하며 이를 받았다[* 혼아미가에서 바친 기록의 경우, 히데타다가 이를 사들였다고 한다.]고 전해진다. 이후 [[메이레키 대화재]]때 불탔으며, 이를 복원한 후에 키슈 도쿠가와가 및 도쿠가와 쇼군가를 오가며 소장하다 1926년에 도요쿠니 신사의 재건당시 봉납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. 봉납 당초에는 재건 주최가 국가였기에 국가 소유의 문화재라는 의미에서 국보가 되었다.[* 이 당시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를 모두 '국보'라고 불렀다.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되자 이들은 중요문화재로 재지정되었으며, 이들 중 그 가치가 유달리 뛰어난 것들은 특별히 국보로 승격되었다. 오늘날 문화재보호법 시행 이전의 국보는 '구 국보', 시행 이후의 국보는 '신 국보'로 부른다.] 1950년 문화재보호법 시행 이후 중요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